언론이나 증권사 리포트에서는 요즘 반도체 후공정이 주목받는 이유를 전공정 미세화의 한계 때문이라고들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그보다는 후공정이 가지는 경제성 때문입니다. 반도체의 후공정은 전공정에서 만들어진, 회로가 새겨진 칩을 여러개 가진 동그랗고 얇은 거울처럼 생긴 웨이퍼에서 각각의 칩을 떼어내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 떼어낸 칩을 작은 PCB(인쇄회로기판)에 붙이고, 검은색 몰딩을 씌우면 우리가 아는 패키지 상태의 반도체 칩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쓰는 스마트폰이나 컴퓨터의 케이스를 뜯어내면 '마더보드'라고 하는 초록색의 기판, 그러니까 커다란 PCB 위에 반도체 칩 등의 여러 부품이 달려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어차피 PCB에 붙일 반도체 칩을 후공정에서는 왜 또 아주 작은 PCB에 붙이는 것일까요? 그냥 후공정을 생략하고 바로 마더보드에 칩을 붙일 수는 없는 것일까요?
물론 반도체 회로를 보호하기 위해 칩 전체를 몰딩으로 감싸버리면 외부와 신호를 주고받을 접점이 없어서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역시 경제성에 이유가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반도체와 PCB는 회로를 가지는 기판이고, 만드는 방법도 비슷합니다. 차이가 있다면 PCB에 있는 회로는 눈으로 선명히 보일 만큼 굵은데 반해, 반도체의 회로는 맨눈으로는 도저히 볼 수 없을 만큼 미세하다는 점입니다. 회로만 미세한 것이 아니라 외부와의 통로인 접점 역시 미세한데, 같은 공정에서 회로와 접점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반면, 상대적으로 투박한 공정에서 만들어지는 마더보드는 회로뿐만 아니라 접점 역시 거대합니다. 납땜을 할 때 부품을 붙이는 그곳 말입니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마더보드의 거대한 접점에 붙이기에는 웨이퍼에서 떼어낸 반도체 칩의 점점이 너무나도 미세하다는 점입니다. 그렇다고 마더보드의 접점을 칩의 접점만큼 미세하게 만들려면 너무 큰 돈이듭니다.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회로와 접점은 같은 공정에서 만들어지므로, 접점의 크기를 반도체 만큼 미세하게 만들려면 엄청난 돈이 드는 반도체 미세공정을 동원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때, 반도체 후공정이 경제적 진가를 드러냅니다. 칩의 미세한 접점을 마더보드의 거대한 접점에 붙일 수 있도록 확장해 주는 역할을 하는 작은 PCB에 칩을 붙이는 것입니다. 아래의 그림에서 'Die'라고 부르는 것이 웨이퍼에서 떼어낸 상태의 칩이고, 'Solder Ball'이 제가 말하는 접점 위에 만들어 주는 땜납같은 것입니다.
그러면, 반도체 패키지는 수십 년 전부터 이렇게 만들어왔는데, 왜, 유독 요즘 들어 후공정이 주목받고 있는지는 아래의 그림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스마트폰이나 무선 이어폰과 같이 마더보드의 크기는 작은 기기임에도 점점 더 고성능이 요구되면서, 부품을 붙일 자리가 모자라게 되자 서로 다른 여러 종류의 칩을 하나의 패키지 안에 넣고 있어서입니다. 여러 종류의 칩을 하나의 기판(Die/다이)으로 만들 수 도 있는데, 그렇게는 거의 하지 않는 이유도 역시 경제성에 있습니다. 선폭도 다르고 특성도 다른 여러 종류의 칩을 하나의 다이로 만들려면, 돈이 많이 드는 미세공정이 필요 없는 회로도 같은 미세공정을 거쳐야 한다는 등의 문제도 있고, 무엇보다 서로 다른 특성의 칩들 중 하나만 불량이라도 전체 다이(칩)는 불량이 되기 때문입니다.
'프로텍'은 반도체 후공정이나 PCB의 표면실장에 쓰이는 장비를 만들어 돈을 버는데, 앞에서 본 그림에서 반도체 다이와 PCB 사이의 빈 공간을 에폭시 같은 물질로 채워주는 '언더필 디스펜서'의 매출 비중이 가장 큽니다. '언더필'을 하는 이유는 반도체 회로와 접점이 점점 미세하고 촘촘해지면서 생기는 신호의 간섭이나 발열문제 등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하니, 이 회사의 미래가 밝아 보입니다. 반도체 회로와 접점은 갈수록 점점 더 미세해질 것이고, 여러 칩을 하나의 패키지에 넣으려면 이 회사가 만드는 장비들은 점점 더 많이 필요할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또, 웬만한 글로벌 반도체 후공정 업체들에게는 모두 장비를 팔고 있으므로, 제가 반도체 장비나 소재 종목을 찾을 때 신경 쓰는, '한두 곳의 고객에게서 거의 모든 매출이 나오지는 않는지?' 하는 우려도 없습니다.
그런데, 만약 지금까지 얘기한 이익의 안정성과 사업의 성장성이 그동안의 실적에서 읽히지 않는다면, 이 종목은 미래에 대한 기대만 있고 실체는 없는 테마주가 될테니, 그 동안 이 회사가 보여준 숫자들을 들여다봐야겠습니다. 아래는 지난 15년간 실적과 이익률의 추이입니다.
매출액과 영업이익이 거의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고, 매출총이익률과 영업이익률의 추이도 비슷하다는 점에서 외부환경의 영향을 크게 받는 종목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매출액이 이익도 결정한다는 말은 회사 내부적인 효율성이 아닌, 업황이나 경쟁사들과의 경쟁 같은 외부에 이익을 결정하는 원인이 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작년에 급락한 이익률을 보면, '2017~2022년의 반도체 경기가 이례적으로 좋았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래의 전 세계 반도체 투자액 추이를 보면 그 생각이 맞는 것 같습니다.
일시적 반등으로 보이는 2010~2011년을 제외하면, 2016년까지의 반도체 투자 증가율은 2017~2022년만큼 높지 않았고, 작년에 급락한 증가율을 보면 '원래의 낮았던 수준으로 돌아가고 있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시간의 지평을 아래와 같이 넓혀보면 생각이 달라집니다.
오히려 2011~2016년의 반도체 투자 증가율이 이례적으로 낮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언뜻 생각해 봐도 앞으로 인공지능이나 전기차 같은 것들이 많이 쓰이려면 훨씬 많은 반도체가 필요할 것이므로, 그때의 낮았던 성장률로 돌아갈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작년에 매출 하락폭 대비 과도했던 이익률 급락의 원인은 집고 가야겠습니다. 아래는 사업보고서 '비용의 성격별 분류'에 나오는 항목들이 매출액에서 차지하는 비율입니다.
작년에 급여와 상각비, 연구개발비가 크게 증가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업보고서 '임직원 현황'을 보면 재작년에 266명에게 149억을, 작년에는 285명에게 157억을 지급했으므로 큰 변동이 없었는데, 이는 '비용의 성격별 분류'에 나오는 재작년 265억, 작년의 376억과는 큰 차이가 납니다. 이유가 뭘까를 찾기 위해 사업보고서를 들척이다가 관계회사였던 '피엠티'가 2023년에는 종속회사가 되어서 연결실적에 반영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관계회사의 실적은 단순한 투자로 보고 지분율만큼의 순이익만 연결회사의 순이익에 포함되지만, 종속회사의 실적은 하나의 회사로 보고 모든 수익과 비용을 하나로 합쳐 재무제표를 작성하는데, 이를 '연결 재무제표'라고 부릅니다. 작년에 전체 매출에서 '피엠티'가 차지했던 비중은 21% 정도의 상당히 큰 비중이었으므로, 이익률 급락에는 '피엠티'가 큰 영향을 미쳤다는 얘기가 됩니다.
그렇다면, '피엠티'라는 회사를 인수한 것이 잘한 짓이었는지가 궁금해지므로, 알아본 피엠티의 실적 추이는 아래와 같았습니다.
한마디로, 제가 찾는 종목과는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이익의 안정성이 떨어져 보여서 그렇습니다. 해당 11년간의 영업이익률을 평균하면 1.06%가 나오는데, 같은 기간 '프로텍'의 평균 영업이익률은 19.9%가 나온다는 점을 생각하면, '피엠티'를 종속회사로 연결시킨 결정이 장기적으로는 이익률을 떨어트릴 요인이 될 것 같습니다.
피엠티는 미국의 '폼팩터', 일본의 'MJC'와 함께 삼성전자에 디램용 프로브카드를 공급하는 국내 유일의 업체이고, 핀 수, 그러니까 반도체 칩의 접점 수가 늘어날수록 원가경쟁력이 강해지는 구조의 기술을 보유한 회사라고 하니, 성장성은 있는 회사로 보입니다. 그렇지만 피엠티가 가진 기술보다 더 싸고 효율적인 기술이 등장할 수 도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여전히 이 인수에는 회의적입니다.
사실 프로텍은 제가 작년 7월까지 4년 정도 보유해서 꽤 큰 수익을 실현했던 종목입니다. 따라서, 최근에 이 종목의 주가가 크게 떨어진 것을 알았을 때는 메이저 리그에 있어야 할 거물급 선수가 마이너 리그에 있는 걸 발견한 기분이었습니다. 제가 팔았던 수준, 혹은 그 보다 높은 수준의 주가가 최소한 1~2년 정도는 지속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최근에 주가가 크게 떨어진 이유는 이 회사의 대표가 '엘파텍'이라는 회사를 만들어 내부거래를 통해 사익을 편취할 목적으로 회계를 조작한 정황으로 검찰이 대표와 재무담당 임원을 기소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사건에 대해서는 이 종목을 다룬 2022년의 제 글에서 자세히 썼고, 사건의 본질이 '편법승계'라는 생각에도 변함이 없으므로, 법원의 판결이 어느 정도 수준일까 만 생각 해 봤습니다.
제가 알아본 최근의 가장 비슷한 예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참고로, 검찰에 고발되는 회계부정은 형사처벌 사건입니다.
. 2023년 7월 17일, 백광산업 대표가 229억을 횡령/배임한 혐의로 구속영장 청구
. 2024년 2월 7일, 1심 선고; 전 대표 - 징역 2년 6개월, 회계임원 - 징역 1년/집행유예 2년, 백광산업 법인 - 벌금 3천만 원
. 검찰 측은 형량이 가볍다며 2심 항소 - 진행 중
2년 전에 쓴 제 글을 읽어본 분들 중에는 '신주인수권부 사채나 보증, 내부거래 같은 고급적인 기술을 동원해서 징벌적인 국내 상속세로부터 소중한 기업의 경영권을 지키려고 했던 이 사안과 단순히 돈을 빼돌릴 목적으로 회계장부를 조작한 백광산업의 사례가 어떻게 비슷할까?'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그 목적이나 방법이 어땠는지를 떠나서 회사돈을 훔친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백광산업의 판결에서 주목한 부분은 전 대표에게 내려진 처벌이 아니었습니다. 대표가 감방에서 몇 년을 살고 나오던 이 회사가 하는 영업에는 큰 영향이 있을 것 같지 않아서입니다. 제가 주목한 부분은 법인에게 내려진 처벌이었는데, 3천만 원이라는 벌금은 고위 임원이 부정을 저지르려고 할 때, 회사에 그걸 막을 수 있는 내부적인 체계가 없었다는데 대한 상징적인 처벌로 보입니다. 이렇게 보면, 대표가 검찰에 기소되었다고 크게 떨어진 주가는 오히려 좋은 매수의 기회를 주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매수'라는 결심을 하지 못한 것은 역시 '피엠티'라는 종속회사의 존재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비중이 20% 정도로, 그렇게 까지 크지는 않고, 반도체 후공정이나 PCB 표면실장 산업의 성장성을 생각할 때, 이 종목을 후보선수로라도 경기에는 꼭 데리고 가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빚을 거의 지지 않으면서도 현금흐름이 좋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후보선수이니 언젠가는 타석에 들어 설 텐데, 그때 저는 이 선수에게 '스트라이크존을 좁히라'라고 말해줄 것 같습니다.
2024년 5월에, 동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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