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그란 거울처럼 생긴 웨이퍼에 회로를 새겨 넣는 반도체 제조공정은 필름 카메라 시대의 사진 인화와 비슷합니다. 반도체 제조에서 사진을 찍는 역할을 하는 노광기를 만드는데 니콘이나 캐논, 칼자이스 같은 필름 카메라 시대의 익숙한 이름들이 등장하는 것 만 봐도 두 기술이 다른 기술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진을 눈으로 보기 위해서는 현상액에 담가 인화를 하지만, 반도체의 회로나 막은 금속과 같은 단단한 물질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원하는 회로를 얻기 위해서는 불필요한 부분을 녹여 없애야 합니다. 또, 최근의 첨단반도체는 회로를 여러 층으로 쌓아 올리는데, 새로운 층을 쌓기 전에 표면의 불순물도 녹여서 씻어줘야 합니다. LCD 같은 디스플레이를 만드는 과정도 이와 비슷합니다.
이 회사는 주로 이렇게 반도체나 디스플레이를 만들때 원하지 않는 부분이나 불순물을 녹여 없애는데 필요한 공정액을 만들어 돈을 버는데, 이런 공정액은 반도체의 회로가 미세해지고 여러 층을 쌓을수록, 또, 디스플레이 면적이 커질수록 더 많이 필요하게 됩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이 회사의 이익은 늘어나고 있어야 하는데, 아래의 지난 15년간 추이를 보면 꼭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이익률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것은 산업주기의 영향이겠거니 하더라도, 왠지 장기적으로 떨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이익률 등락의 원인이 반도체 주기의 영향이 맞는지부터 알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위의 반도체 투자액과 시장의 성장률을 그린 표를 아무리 눈을 씼고 봐도 이 회사 이익률의 추이와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다시 생각해 보니 이 회사 매출액의 추이는 큰 등락 없이 우상향 하고 있었습니다. 반도체 주기에 큰 영향을 받았다면 매출액부터 큰 등락이 있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문제가 더 심각해 졌습니다. 매출은 느는데 이익률이 장기적으로 떨어지고 있다는 말은 경쟁력이 떨어지고 있어서 제품값을 낮춰 파는 것 외에는 더 많이 팔 방법이 없었다는 말일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익률 등락의 이유를 더 심각하게 찾아야 합니다.
매출총이익은 매출액에서 원가를, 영업이익은 거기서 판매비와 관리비를 빼서 구하므로, 이 종목과 같이 매출액에는 큰 등락이 없었고, 영업이익률은 매출총이익률을 따라 움직였다는 말은 매출총이익률, 그러니까 판가나 원가에 이익률 등락의 원인이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아래는 사업보고서에서 찾을 수 있는 공정액과 기타 제품(정밀화학 소재)의 판가와 원재료비에 해당하는 '주요 용제'와 나프타의 가격 추이입니다.
나프타 가격을 보는 이유는 나프타는 거의 모든 석유화학 소재의 기초원료가 되므로, 이 회사와 같은 정밀화학 회사의 원가를 파악할때 유용하게 참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왼쪽 그림 붉은 선의 용제가격 방향이 나프타와 다르지 않고, 오른쪽 그림의 이 회사 이익률 추이가 거의 정확히 나프타 가격과 반대로 움직였다는 점에서 이익률 등락의 주범은 원재료 가격이었음이 명백해졌습니다. 이익률이 원재료비에 좌우된다는 말은 마진이 거의 없는 제품을 대량으로 팔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이 회사 매출은 대부분 공정액에서 발생하고, 정밀화학 소재의 판가는 원재료비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다는 점에서 원재료비의 영향을 크게 받는 제품은 매출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공정액 임도 쉽게 유추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시 앞의 판가와 원재료 가격 추이 그래프로 돌아가서 검은선의 공정액 판가 추이를 유심히 보면, 2018년 이후 공정액 판가는 용제나 나프타 가격과는 상관없이 오르고 있는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용제나 나프타 가격도 길게 보면 오르고 있었으니, 시차를 두고 판가에 반영된 것이겠지'해도, 5년간 공정액 판가는 89%가 오른 반면, 용제가격은 고작 20% 올랐습니다. 또, 시차를 두고 원재료비가 반영됐다고 보기에는 그 방향성이 무작위에 가까워 보입니다.
한두해도 아니고 5년이나 이렇게 판가가 큰 폭으로 오르고 있는 종목을 저는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뭔가, '미스터 마켓'은 아직 모르고 있는 것을 알아낸 기분입니다. 판가가 지금처럼 계속 오르거나 유지만 되어도 이익률은 당연히 오를 것이니, 저는 대박종목을 들고 있는 셈이 됩니다. 좀 더 확신을 가지기 위해 판가가 왜 오르고 있는지를 알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회사 연혁을 살펴보면, 이 회사는 2010년대 이전 까지는 주로 LCD 제조에 쓰이는 공정액에서 대부분의 돈을 벌었는데, 특히 LCD용 신너는 국내시장을 거의 독점하고 있었습니다. 2010년대 이후 반도체용 신너 시장을 잠식하기 시작했고, 최근 몇년간은 반도체용 식각액 시장도 잠식 중으로, 반도체 분야의 매출비중이 디스플레이 분야 보다 더 커졌다는 것 도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뭔가 전체적인 윤곽이 잡힙니다.
위의 왼편그림 파란선으로 보이는 한국의 디스플레이 시장점유율과 앞에서 본 원재료 가격 추이를 겹쳐 생각하면 이 회사의 2019년 이전 이익률 그래프와 비슷해 지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국내 LCD용 신너시장을 독점하고 있었으니, 한국의 점유율이 높았던 2010년대 초반까지 이 회사 이익률은 높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2010년대 이후 중국의 점유율이 높아지면서 판매량이 예전만 못해지자 이익률은 원가의 영향을 크게 받는 구조가 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중국에도 'CSOT'라는 걸출한 고객사가 있기는 하지만, 독점을 하던 시절에 비할바는 아닙니다.
2018년 이후 판가가 거침없이 오르고있는 비결은 반도체용 식각액 매출비중이 커지고 있어서로 보입니다. 어디선가 읽은, 이 회사는 '솔브레인'이 독점 공급하던 삼성전자 반도체 식각액 시장을 2015년에 진출했고, 2017년에는 3D 낸드 식각액 공급을 위해 천안에 새로 공장을 지었다는 내용을 메모해 두었기 때문입니다.
종합해보면, 주요 제품들 중 신너, 특히 LCD용 신너가 들죽 날쭉한 이익률을 만든 주범으로 보입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회사 연혁에 자랑처럼 나오는 '세계최초 LCD 신너 폐액 재활용 기술 개발'도 폐액을 재활용할 엄청난 시설을 설치해도 수지타산이 맞을 정도로 원재료비가 비쌌다는 말이 됩니다. 그런데, LCD 산업이 이미 중국에 거의 다 넘어갔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LCD용 신너가 더 이상 이익률을 갉아먹기는 힘들어 보이고, 다른 제품들, 특히 반도체용 식각액 비중의 증가로 나타나는 판가의 상승을 생각하면, 앞으로 이익률은 높아질 길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이제 거의 다 왔습니다. 남아있는 유일한 의문인 '최근 몇년간 판가가 오르고 있음에도 이익률은 왜 떨어지는지?'에 대한 답이 '장기적으로 영향을 미칠 요인 때문은 아니었다' 라면, 이 주식은 대박종목이 됩니다.
다음은 사업보고서 '비용의 성격별 분류'에 나오는 각 항목들이 매출액에서 차지하는 비중입니다. 형광펜으로 표시한 부분들은 매출총이익률이 20% 밑으로 떨어진 해에 거기에 큰 영향을 줬을 것 같은 항목들을 표시한 것입니다.
최근 3년간 나프타와 용제 가격이 급등했음에도 세계적인 공급대란이 있었던 2021년을 제외하면 재료비 비중은 크지 않았다는 점이 고무적입니다. 상각비 비중이 증가한 것은 최근에 식각액 원료인 불산 제조설비에 큰 투자를 했고, 미국 텍사스에 새로 공장도 지었기 때문인데, 이는 모두 미래의 이익을 늘려줄 요소들입니다.
작년에 '기타' 비용이 증가한 정확한 원인은 찾을 수 없었지만, 미국법인과 2021년에 인수한 '유비머트리얼즈'에서 200억이 넘는 유형자산 손상차손을 인식한 점으로 미루어 두 자회사의 구조조정과 관련된 비용 때문으로 보입니다. 두 법인 모두 설립되고 인수된 지 얼마 안 된 회사들이고, 두 회사 모두 매출액은 증가하고 있다는 점, 또, 기타 비용이 이렇게 급등한 해는 처음이었다는 점에서 이 역시 장기적인 영향을 미칠 요소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이쯤이면 대박종목이 될 근거를 모두 찾은 듯한데, 왜 글 제목에 '매도'가 있는지 궁금하실 것 같습니다. 제가 이 주식을 정리하기로 마음먹은 데는 아래에 보이는 지표들 중 하나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마이너스로 떨어진 ROE나 부쩍 치솟은 부채비율은 큰 걱정 거리가 아니었습니다. 이익이 늘어나면 해결될 문제들이고, 이익이 늘어날 것이라는 확신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 결심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재무지표는 오른쪽 그림에 붉은선으로 보이는 주당자유현금흐름이었습니다. 선이 보이지 않는 해가 많은 것은 로그축에 그린 그래프여서 마이너스 값은 표시되지 않았기 때문인데, 구체적인 수치는 아래와 같습니다.
순이익이 회계상의 숫자일 뿐인데 반해, 자유현금흐름은 그 기업이 장사를 해서 실제로 남기는 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순이익에 실제로는 쓰지 않은 돈을 더하고 실제로는 쓴 돈은 빼서 구하는 '영업활동 현금흐름'에서 '투자활동 현금흐름' 중에서 현상유지를 위해 썼다고 간주되는 '유형자산 투자액'을 빼서 구하기 때문입니다.
지난 15년간 이 회사 자유현금흐름이 마이너스인 해가 많았던 것은 유형자산 투자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최근 몇 년간은 시설투자가 많았다는 점을 고려하고 봐도 과거부터 붉은색 숫자가 더 많이 보이고, 그 금액도 더 커 보입니다. 앞에서 말한 판가의 상승으로 이익률이 오르면 분명히 영업활동 현금흐름도 증가할 것이긴 합니다. 하지만, 그쯤이면 이 회사가 시설투자를 줄일 수 있을지가 의문스럽습니다. 과거의 숫자들로 봐서는 2~3년 정도는 줄일수 있겠지만, 곧 다시 시설투자액을 늘려야 하는, 그러니까, '이 회사는 이익률을 높이거나 높아진 이익률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버는 돈보다 많은 돈을 지속적으로 투자해야만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사라질 것 같지 않습니다.
제가 자유현금흐름의 장기추이를 보는 이유는 ROE가 아무리 높게 나오는 종목이더라도 현금흐름의 추이가 좋지 않으면 그 높은 ROE를 인정해 줄 수 없으므로, 그런 종목은 거르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지금이 아직 이번 반도체 주기의 초기국면이라는 점과 인공지능의 수혜, 삼성전자 텍사스 공장 등을 생각하면, 이 종목 주가는 최소한 1~2년 정도는 큰 폭으로 오를 것 같습니다. 장기적인 관점과 단기적인 관점이 충돌하는, 며칠을 고민해도 쉽게 결정을 내리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럼에도 제가 비교적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이유는 제게는 이런 순간마다 충고를 해주는 선생님이 한분 계시기 때문인데, 지금까지 그 선생님의 충고를 따랐을 때 손해를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번에 들은 충고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10년 동안 보유할 생각이 아니라면 단 10분도 보유해서는 안 됩니다.' - 워런 버핏
다음은 지난 5년 좀 넘게 이 주식을 보유해 얻은 성과입니다.
- 매수 시점/단가: 2018년 12월 / 12,854원
- 매도 시점/단가: 2024년 5월 / 28,720원
- 보유기간: 5년 5개월
- 보유기간의 주가 상승률: 2.23배
- 연복리수익률: +15.97%
제가 주식을 매도하는 경우는 종목분석에 심각한 실수가 있었음을 깨달았거나, 주가가 내가 생각하는 내재가치의 상단에 도달한, 단 두 가지 경우뿐입니다. 수익률과는 상관없이 전자는 실패한 투자, 후자는 성공한 투자가 됩니다. 이 경우는 전자에 해당하는데, 실패한 투자 치고는 수익률이 꽤 좋습니다. 싸게 살 수 있었던 덕분입니다.
2024년 5월에, 동해에서..
'투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켜볼 주식 - 프로텍 (코스닥: 053610) (13) | 2024.05.27 |
---|---|
10년을 보유할 주식 - 유니셈 (코스닥: 036200) (2) (0) | 2024.05.13 |
주식의 내재가치 추정 (37) | 2024.04.20 |
10년을 보유할 주식 - 유나이티드제약 (코스피: 033270) (2) (40) | 2024.04.18 |
10년을 보유할 주식 - 오리온 (코스피: 271560) (2) (0) | 2024.04.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