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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

나는 장기투자자인가?

 엊그제 우연히 시골의사 박경철의 강의 영상을 보고, '내가 하는 투자는 저 사람에 비하면 장기투자가 아니었군'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본 강의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990년대 초 대전의 개원병원에서 의사로 일하던 박경철은 어느 날 서울의 큰 경제연구소에 근무하던 친구가 놓치면 후회할 강연이 있으니 꼭 보러와야 한다는 전화를 받습니다. 백수친구 한 명과 같이 서울로 가서 강연을 듣게 되었는데, 청중들은 대부분 경제나 산업을 연구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강연자가 등장해 칠판에 'WWW'를 적더니 앞으로는 은행과 증권사, 심지어 핵무기나 전쟁까지 모든 것들이 이 안에서 이루어지게 될 것이라는 내용의 강연을 시작하자 20~30분 만에 모든 청중들이 나가고, 자신과 경제연구소 친구, 백수친구 단 세명만 남아서 강연을 듣게 됩니다. 당시는 인터넷 도입의 초창기였으니, 다들 미친놈이 떠드는 헛소리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강의가 끝나고 나오면서 경제연구소 친구에게 '뭐 저런 미친 소리를 들으러 오라고 했냐'라고 투덜대자, 그 친구도 저런 얘기일 줄 몰랐다고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백수친구가 돈을 좀 빌려달라기에 '왜 그러냐?'라고 했더니, W 어쩌고 하던 그 사람을 만나 봐야겠다는 겁니다. '너도 미쳤냐? 그냥 술이나 먹으러 가자'라고 했지만 요지부동이었던 백수는 기어코 돈을 빌려 W에게 밥과 술을 사주며 새벽까지 얘기를 들었다고 합니다.

 

 그로부터 2~3년 후 그 백수친구가 작은 사무실을 빌려 이메일 시스템을 개발하는 회사를 차렸다고 하자, 박경철은 '너 일 년에 편지를 세 통 이상 쓰냐? 설령 그런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우표값 30원이 아까워서 컴퓨터를 사겠냐?'라고 핀잔을 줍니다.

 

 그런데, 얼마 후 병원에도 인터넷이 깔리고 병원 직원들이 백수가 개발한 이메일을 메신저처럼 사용하는 것을 보고 생각이 바뀌기 시작합니다. 또, 알고 보니 그때 그 강연을 했던 W는 인터넷 포털 '다음'의 창업자였습니다. 그러니까, 미친놈이 아니라 천재였던 것입니다.

 

 이때부터 박경철은 W가 천재였던 것은 그렇다 치고, 난다 긴다 하는 경제연구소의 수재들도 알아보지 못한 천재를 백수는 어떻게 알아봤을지를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던 중 읽은 제러미 리프킨의 책에서 어떤 깨달음을 얻게 되는데, 인류 문명은 0.1%의 천재와 그 천재를 알아본 0.9%의 통찰력 있는 인간, 즉, 1%의 인간이 만들어간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머지 99%의 인간은 천재를 미친놈 취급하며 조롱하다가 실제로 그것이 발명되고 보급되면 '세상 참 좋아졌네' 하는 잉여인간들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W는 0.1%의 인간이었고 백수친구는 0.9%, 자신과 다른 청중들은 잉여인간이었던 셈입니다.

 

 수십만 년 전 인류가 가진 유일한 자산이 돌도끼뿐이던 시절에 처음 활을 만들던 사람은 어린아이 장난 같은 짓을 하는 미친놈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또, 방적기가 처음 발명되었을 때 방적기의 진가를 알아본 영국의 농장주들은 자신의 감자밭을 갈아엎고 양을 키워 양털을 팔아 엄청난 부를 이룬 등, 이런 예는 역사에 무수히 많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박경철은 자신이 0.1%가 될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므로, 어떻게 하면 0.9%가 될수 있을지를 생각합니다.

 

 그러던 중 자신이 근무하던 병원 원장으로부터 '병원이 자리를 잡는데 수고를 많이 해주었다'며 당시 그랜져 자동차 값에 맞먹던 휴대폰을 선물 받습니다. 친구들을 만난 자리에서 휴대폰을 자랑하며 앞으로는 사람들이 휴대폰을 들고 다니게 될 것이라고 무심코 말하자, 친구들은 '삐삐는 5천 원이면 사고 통신비도 한 달에 2~3천 원이면 되고, 통화는 공중전화로 하면 되는데, 누가 그 비싼 휴대폰을 사느냐?'며 핀잔을 줍니다. 박경철은 자신이 헨리 포드의 자서전에서 읽은, 처음 자동차를 개발했을 때 '누가 수백 명은 탈 수 있는 기차를 놔두고 네 명밖에 못 타지만 기차만큼 비싼 자동차를 사냐?'라고 세상사람 모두가 조롱했다던 장면과 데자뷔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바로 이게 W구나!' 하고 확신이 든 박경철은 당시 공기업이었지만 직원들이 내 던지는 자사주가 명동 사채시장에서 거래되던 '한국이동통신' 주식을 2만 원에 사기 시작합니다. 얼마 후 6만 5천 원에 'SK텔레콤'이라는 이름으로 상장하지만, W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월급만 받으면 그 주식을 더 샀다고 합니다. 3~4년 후 1999년 말, 이제 W의 세상이 되었다고 생각해 주식을 모두 팔았을 때 주가는 무려 520만 원이었다고 합니다.

 

 이 강의영상을 본 후 피상적으로 알아본 박경철의 이후 투자행보는 제 기대와는 좀 많이 다른 듯해 보였지만, 강의 내용에서 말한 '한국이동통신' 투자는 제게 장기투자자가 하는 투자처럼 보였습니다. 3~4년의 투자기간이 아니라, W의 세상이 오기까지는 10년이고 20년이고 그 주식을 사서 모은다는 자세가 그래 보였습니다. 필립 피셔가 전자산업과 종목의 성장을 확신하며 1950~1960년대에 산 '모토로라'와 '텍사스 인스트루먼츠'를 30년 넘게 보유했던 유명한 일화와도 일맥상통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제가 하는 투자는 장기투자가 아닙니다. 사실, 꼭 박경철의 '한국이동통신' 투자나 필립 피셔의 투자와 비교해서가 아니어도 그렇습니다.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주식의 분석은 채권의 분석과 다르지 않다'는 말을 들어 보았을 것입니다. 들어 보지 못했다면 아직 공부가 부족하거나, 차트분석이나 테마주 같은 도박을 하고 있을 확률이 높습니다. 미국에서는 5년 이하의 만기를 가지는 채권은 단기채권으로, 10년 이하는 중기채, 10년을 넘는 만기를 가진 20~30년물의 채권을 장기채권으로 분류합니다. 50년물이나 영구채는 초장기 채권이라고 합니다. 이 분류의 기준으로 보면 10년 정도 보유할 마음으로 주식을 사지만, 실제로는 대부분의 종목을 5년이 채 안 되어 매도하는 제 투자는 확실히 장기투자와는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최소한 10년은 보유하며, 그 사이에 주가가 반토막 나더라도 확신을 가지고 더 사서 모을 수 있는 종목을 고르지만, 주가가 제가 생각하는 내재가치의 하단이나 상단에 도달하면 내 분석이 틀렸다는 확신이 들지 않는 이상 기계적으로 하단에서 사고 상단에서는 파는데, 그 기간이 대부분 5년을 넘기지 않습니다.

 

 물론, 보유하고 있는 종목들 중에는 7년 넘게 보유하고 있는 종목도 있고, 종목을 분석하는 실력도 점점 더 낳아지고 있으므로 앞으로는 분석에 심각한 오류가 있었음을 발견하여 매도하게 되는 종목은 줄어들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평균적인 종목의 보유기간은 5~6년에서 크게 늘어날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보유 중인 종목들 중 일부는 아마도 10년 넘게 계속 보유할 종목도 나오게 될 테지만, 이는 20~30년 이상의 장기적인 성장을 확신해서가 아닌, 아직 주가가 내재가치의 상단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확실히 저는 가치투자자이지 진정한 의미의 장기투자자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20~30년 이상의 앞날까지 생각하는 진정한 의미의 장기투자를 믿지 못하는 이유는 제게는 그렇게 까지 먼 미래를 내다볼 통찰력이나 혜안이 없어서이기도 하지만, W 산업의 성장이 그 산업에 속한 종목의 성장과는 일치하지 않는 사례가 많기 때문입니다. 사실, 강의에 등장했던 '다음'도 한때는 인터넷 산업을 평정하는 듯했지만, 카카오가 인수하지 않았다면 지금은 없어졌을지도 모를 회사입니다. 또, 백수친구가 개발한 국내 최초의 이메일 상용서비스는 이미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사실, 처음 박경철의 강연영상을 보고 지금의 W는 뭘까를 생각해 봤습니다. '인공지능이나 2차전지가 그런 산업일 텐데, 그렇다면 주가가 이미 천정부지로 치솟은 '엔비디아'나 'LG에너지솔루션'을 사야 하나? 그렇다면, 테마주 투기와 뭐가 다른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박경철처럼 초기에 W가 될 업종의 대표주를 사서 그 업종의 주가가 과열되면 팔고 나오면 되지 않겠냐고 생각이 들지 모르겠지만, 그게 바로 테마주 투기입니다. 그렇게 보면 박경철도 만 명 중에 한두명 정도 있었을 운이 좋았던 테마주 투기꾼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카지노에서 돈을 버는 사람은 만명 중에 한두 명일 운이 좋은 사람을 제외하면 카지노 주인 밖에 없습니다. 나머지는 모두 '봉'일뿐입니다.

 

 제가 하려는 투자는 어떤 업종이나 종목의 주가 방향을 맞춰 거기서 큰 수익을 얻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대신, 저는 세월이 지나도 크게 바뀔 것이 없는 산업이나 종목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런 종목은 주가가 크게 요동쳐도 심리적인 타격이 적고, 그 종목의 주가가 저평가 일 때 사서 고평가 일때 판다면 큰 수익을 얻을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제가 장기투자자인지 아닌지는 저를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다를 것이지만, 분명히 말할 수 있는 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겁이 많고 걱정을 많이 하는 저는 0.9%의 통찰과 혜안을 담대하게 장기간 밀고 나갈 수 있는 사람은 아니고, 0.1%의 천재는 더더욱 아닙니다. 하지만, '봉'들의 심리로 크게 요동치는 가격 변동을 이용할 수 있을 정도의 미천한 깜냥으로 큰 부자는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가치투자자입니다.

 

2023년 11월에, 동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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