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의 제조공정을 크게 분류하면, 얇고 동그란 거울처럼 생긴 실리콘 웨이퍼 위에 미세한 회로를 만드는 전공정과 이렇게 만들어진 회로를 현실의 세상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접점을 만들어주고, 미세한 회로를 보호하기 위해 몰딩을 입혀주는 후공정, 그리고, 회로에 전기적인 신호를 흘린 후 분석하여 회로가 제대로 만들어졌는지를 검증하는 테스트 공정이 있습니다. 이 세 공정의 주요 장비들을 시장의 크기와 기술적인 난이도로 순서를 정하면, 전공정> 테스트 공정> 후공정의 순서가 되는데, 한미반도체가 만드는 장비들은 후공정에 사용됩니다.
각각의 세부 공정별로 지배적인 장비업체가 정해져있는 전공정과 테스트 공정을 놔두고 시장의 규모도 작고, 경쟁도 훨씬 치열해 보이는 후공정 장비를 하는 동사에 제가 주목하는 이유를 의아하게 생각할 분들도 꽤 있을 것 같습니다. 실제로, 노광공정의 ASML, 식각공정의 램리서치, 증착공정의 어플라이드 머티리얼스, 테스트 공정의 테러다인과 어드반테스트 등과 같이 전공정과 테스트 공정은 세부 공정별로 한두 개 업체가 전 세계 시장을 거의 독식하는 구조인데, 여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날 반도체회로의 선폭은 마이크로에서 나노미터 단위로, 육안으로는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미세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사람의 손으로는 제작이 불가능하므로 장비에 의존하게 됩니다. 그런데, 365일 내내 24시간 가동해야 하는 반도체 공정에서 증착공정과 같은 장비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그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다음 단계의 모든 공정들이 멈추어 있어야 하는데, 이때 발생하는 손실은 천문학적인 단위의 금액이 됩니다. 해당 공정에서 점유율이 미미한 신생업체의 장비를 썼는데 문제가 발생한다면, 엄청난 손실은 누가 책임을 지겠습니까? 때문에, TSMC나 삼성전자와 같은 반도체 제조사들은 장비와 소재의 선택에 신중할 수밖에 없고, 점유율이 높은 검증된 장비와 소재에 의존적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반면, 후공정에서 장비의 선정은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편인데, 여기에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대게 웨이퍼 한 장에는 수십에서 수백 개의 개별 칩이 생성되게 되는데, 전공정에서 다루는 제품의 최소 단위는 이 웨이퍼 한 장인데 반해, 후공정에서는 웨이퍼에서 잘라낸 개별 칩 한 개가 최소 단위가 됩니다. 또, 공정상에서 발견되는 문제들은 대게 개별 칩이나 웨이퍼 한 장을 통해서가 아닌, 로트 단위, 그러니까 수백에서 수천 개의 칩이 해당 공정을 마친 후에 발견되는 경우가 많은데, 특히, 전공정의 경우가 더 그렇습니다. 이는 나노미터 단위의 회로를 다루는 전공정에서 문제의 원인을 찾을 때와 엑스레이 사진 몇 장으로도 몰딩 내부에 빈 공간이 있다던가, 칩의 전극과 기판 사이의 본딩이 제대로 되지 않은 등의 문제를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후공정을 상상해보면 쉽습니다.
'그렇다면, 전공정 장비를 만드는 수위권의 업체들은 튼튼한 진입장벽을 갖추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겠지만, 제 생각은 좀 다릅니다.
여러 번 투자는 미래에 대한 영역이라고 얘기했습니다. 지금 당장의 막강해 보이는 기술적인 진입장벽도 전에는 쓰이지 않았던 새로운 기술을 기반으로 하는 신규 진입자에 의해 쉽게 허물어질 수 있습니다. 특히, 노광이나 식각, 증착 같은 한 분야의 기술에 의존하는 회사라면 더욱 그럴 위험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노광장비 시장을 삼분했던 니콘과 캐논의 몰락이 가장 좋은 예가 아닐까 싶습니다.
극자외선이니 플라스마니 하는 거창하게 들리는 기술에 의존해야 하는 전공정 분야와는 달리, 후공정 분야는 기본적으로 (웨이퍼에서 칩을) 자르고, (잘라낸 칩을 기판에) 붙이고, (그위에 몰딩을) 씌우는 것이 다 이기에, 시중에서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는 엑스레이나 레이저 정도의 기술을 응용하므로 혁신적인 신기술이 산업의 생태계를 뒤흔들 위험은 거의 없어 보입니다.
또, 기술적인 난이도가 전공정 분야에 비해 낮다는 말이지, 후공정 역시 밀리미터 이하의 단위를 다루는 정밀산업이기에 마음과 돈만 있다고 누구나 성공할 수 있는 분야는 아닙니다. 이런 분야에서 10년 이상 수위의 지위를 확보하고 성장해가는 기업이라면, 투자의 대상으로 주목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동사의 'Vision Placement'라는 장비는 반도체 패키지의 절단> 세척> 비전검사> 적재를 일괄 처리해 주는 장비로, 10년 이상 세계시장에서 독점적인 점유율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또, 전자파차폐 장비 역시 글로벌 수위의 점유율을 확보했고, 그 외에도 다양한 장비들을 개발해 국내는 물론, 세계시장에 판매 중이니 동사의 역량은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입니다.
제가 동사에 주목하는 또 한 가지 중요한 요인 중 하나는 이익의 안정성이 뛰어나다는 점입니다. 대부분의 국내 장비업체들은 메모리 반도체를 만드는 삼성전자와 하이닉스 외에는 의미 있는 비중의 고객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면, 동사는 주로 비메모리 반도체용 장비를 하고 있는 덕분에 아래에 보이는 전 세계 10대 후공정 수탁업체들은 물론, Skyworks나 Infineon, 삼전, 하이닉스 같은 종합 반도체 회사들도 고객으로 확보하고 있습니다. 비메모리 반도체 산업이 메모리에 비해 업황의 변동이 적다는 점을 생각할 때, 이는 동사 주식을 흔들리지 않고 오래 보유하기에 편하다는 말이 됩니다.
그럼, 이런 동사의 장점들이 그간 실적과 주가에 잘 반영되어 왔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아래는 지난 15년 정도의 주가와 실적의 추이입니다.
실적과 주가에 등락이 보이는 것은 장비업체의 특성임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소재나 부품과 달리 반도체를 만드는데 매년 새로운 장비가 필요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전반적인 이익과 주가의 흐름이 우상향해 왔지만, 2010년대 내내 매출액은 정체되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런 것들의 원인을 알아보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미래에도 반복될 수 있는 원인이 있는지를 생각해 보기 위함입니다.
위의 동사 이익률 추이를 보면, 비교적 일정했던 매출액과 달리, 2010년대 초반의 이익률이 배 가까이 낮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2013년까지 BMW 자동차를 수입해 판매하는 '신호모터스'가 종속회사였기 때문으로, 2014년 지분을 팔아 연결에서 제외된 이후 이익률이 급증했다는 점에서 동사의 사업이 최소한 BMW를 파는 것보다 많이 남는 사업임을 알 수 있습니다.
가파르게 주가가 치솟아있는 지금이 이 주식을 사기에 적절한 시점이 아닌 것은 확실하지만, 과거의 실적과 주가의 패턴을 고려하면, 몇 년 내에 이 주식을 살 기회를 잡을지도 모르겠습니다.
2021년 7월에, 동해에서..
'투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안전자산의 편입 (6) | 2021.08.14 |
---|---|
합병 차익거래와 전환사채 (2) | 2021.07.20 |
왜, 삼성전자 주가는 오르지 않을까? (5) | 2021.07.10 |
10년을 보유할 주식 - Ross Stores Inc (Nasdaq: ROST) (2) (4) | 2021.07.06 |
지켜볼 주식 - Taiwan Semiconductor Manufacturing Company Ltd. (NYSE: TSM) (0) | 2021.07.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