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쓴 'ADI'에 대한 글에서는 아날로그 반도체 업종의 안정성에 대해 다소 장황하게 얘기했지만, 이 업종이 변화가 빠른 전자산업에서 그토록 안정적인 가장 큰 이유는 메모리나 CPU 같은 디지털 반도체와는 달리 설계를 자동화하고 검증하는 게 쉽지 않아서로 보입니다.
디지털 반도체는 전류가 흐르지 않을때는 '0', 흐르면 '1'이 되는 스위치를 무수히 많이 배열하기에, 그 설계에 논리식이나 진리표를 사용하여 쉽게 자동화할 수 있고, 검증도 쉽습니다. 설계를 검증하는 게 쉽다면, 그 반도체의 결함이 설계에서 비롯된 것이지 아니면 제조공정에서 비롯된 것인지가 명확해 지므로, 설계와 제조공정의 분리가 가능해집니다. 그러니까, 대량생산을 해야 하는 메모리를 제외하면, 오늘날 로직반도체 업계가 설계만 하는 팹리스와 제조만 하는 파운드리로 이원화된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천문학적인 돈이 드는 제조공정을 갖추지 않아도 되고 설계를 자동화 할 수 있기에 처음부터 많은 설계자가 필요치도 않다는 말은 진입장벽이 낮다는 말과 같습니다. 실제로, ARM이나 퀄컴, 미디어텍, 엔비디아 같은 회사들은 PC의 시대에는 듣도 보도 못하던 회사들이었습니다.
반면에, 아날로그 반도체의 경우는 빛이나 소리, 압력, 전기 같은 자연계에서 생기는 파동의 크기와 모양, 주파수 등을 조작하는 회로이기에, 설계에 전기공학과 자연과학의 배경지식이 필요하고 설계자의 의도가 많이 반영되므로, 그 설계를 자동화하는 게 어렵고 검증도 쉽지 않습니다. 따라서, 아날로그 반도체에서는 런을 여러 번 흘려 보면서 오류를 수정하게 되는데, 바로 이점이 모든 아날로그 반도체 대기업들이 자체 팹을 보유하는 이유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아날로그 반도체 업종은 앞으로 세상이 어떻게 변하더라도 아무런 미동도 없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얘기는 다음의 이 회사 숫자들을 좀 보면서 하는게 좋을 듯합니다.
아래는 이 회사 실적과 이익률의 지난 15년간 추이입니다.
2011~2012년과 2023~2024년의 영업이익이 급전직하했음이 눈에 띕니다. 아래 그래프에 푸른 선으로 표시된 반도체 시장 성장률을 보면, 반도체 시장은 고점에서 고점으로 이어지는 주기가 3~4년 정도로, 다른 산업들에 비해서 매우 짧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주식투자자에게는 축복과 같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가령, 철강이나 조선, 건설업과 같이 산업의 주기가 수십 년에 이른다면 주가가 고점을 회복하는데 십년 넘게 걸릴지도 모릅니다. 또, 종목을 분석하기 위해 직전 고점이나 저점때 자료를 찾는일은 쉽겠습니까? 자료를 찾을수 있다고 하더라도 당시와는 달라져있을 거시경제 환경이나 경쟁관계, 지정학적인 요인들 까지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변화는 3~4년 이내에는 크게 일어나지 않는 경우가 많고, 큰 변화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3~4년 이전 정도의 상황 정도는 기억하고 있을것 이므로, 기억에도 없고 자료를 찾기도 힘든 수십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또 한 가지는, 앞에서 얘기하던 2011~2012년과 2023~2023년의 시장환경이 좋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역시 시장환경이 좋지 않았던 2015~2016년이나 2019년에 비하면 이익률의 하락폭이 훨씬 컸던 이유가 궁금해집니다.
이런 것들을 알아봐야 하는 이유는 이익이 급감했을 때는 대개 주가도 급락하게 되는데, 실적악화의 이유가 조만간 반등할 업황의 일시적인 악화가 아닌, 회사가 가진 경쟁력의 약화나 대체재 같은 것들이 등장해서라는 생각이 들 경우, 주가가 반토막 난 상태에서 겁을 먹고 그 주식을 팔아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돈을 잃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이익률의 그래프로 돌아가서, 2011~2012년에는 매출총이익률에 비해 유독 영업이익률의 하락이 컸음을 볼 수 있습니다. 매출총이익은 매출액에서 원가를 빼서 구하고, 영업이익은 거기서 이 회사의 경우 연구개발비와 판매비, 관리비, 기타 비용들을 빼서 구하므로, 영업이익률의 하락폭이 매출총이익률의 하락폭에 비해 유독 컸다는 말은 경쟁이나 업황 같은 외부적인 요인보다 내부적인 요인이 크게 작용했다는 말이 됩니다. 실제로 그랬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당시의 손익계산서를 찾아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형광펜으로 표시한 인수비용과 구조조정 비용이 급증한 데서 당시에 다른 회사를 인수했고, 구조조정도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또, 회사의 연혁을 살펴보면 당시 대규모의 인수와 무선사업부의 구조조정이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인수와 구조조정 이후 실적과 이익률이 장기간 우상향했다는 점에서, 이 회사가 자신들이 잘 모르는 사업을 인수하거나 미래의 성장동력이 될지도 모를 사업을 버리거나 하지는 않는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당시 이익의 급락은 미래에 대한 투자비 때문이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번에는 2022~2023년의 이익률이 급락한 이유를 알아볼 차례입니다. 아래는 역시 손익계산서 중 일부입니다.
이번에는 다른 특별한 비용의 증가는 볼 수 없고, 매출이 줄었음에도 원가와 연구개발비가 증가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매출이 줄었는데, 왜 두 항목은 늘었던 것일까요?
사업보고서를 읽어 보면 작년과 재작년에 2022년에 문을 연 두 곳의 300mm 팹을 증설, 그러니까 제조설비를 늘렸다는 말이 나오고, 감가상각비의 세부적인 내용은 공개하지 않지만 원가에 반영한다고 돼 있습니다. 또, 유형자산의 감가상각, 그러니까 건물이나 설비를 사는데 든 돈을 사용연한에 따라 매년 조금씩 장부상에서 지워 없애는 기간도 건물은 40년, 설비는 5~10년이 걸리므로, 건물보다 설비를 늘렸을 때 이 회사의 감가상각비는 더 크게 증가한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또, 유형자산의 총액 중 설비가 차지하는 금액도 건물보다 더 큽니다.
그러니까, 주로 새 공장 두 곳에 채운 설비들의 상각비가 원가에 반영되어 매출총이익률을 떨어 드렸고, 그 새로운 제조라인을 가동하는데 든 연구개발비가 영업이익률을 떨어트렸을 것이라는 걸 쉽게 유추할 수 있습니다. 상각비 같은 회계상의 놀음이 아닌, 실제로 유형자산을 늘리는데 쓴 금액이 궁금하다면 현금흐름표를 보면 됩니다.
종합하면, 이번에도 일시적인 이익률의 급락을 감수하고 불황기에 미래에 대한 투자를 늘렸다는 말인데, 그게 지난 10년과 같이 앞으로의 10년도 이익률 상승이라는 결과로 나타날 수 있을까요? 심지어 최근에는 새로운 300mm 팹 한 곳을 완공했고, 조만간 두 곳의 300mm 팹을 더 지을 것이라고 합니다. 부채비율도 높은 것 같은데..
부채비율은 별로 걱정되지 않습니다. 이 회사가 가진 부채는 거의 대부분 이 회사가 발행한 1~5% 이자율의 회사채인데, 그 만기가 무려 2063년까지 분산돼 있습니다. 또, 10년 평균 ROE가 40% 넘게 나오는 회사가 5% 이자를 주는 게 무슨 대수겠습니까?
염려되는 점은 300mm 팹을 너무 많이 늘리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점인데, 300mm 웨이퍼는 200mm 웨이퍼로 생산할 때 보다 같은 칩이면 두 배 넘게 많이 나오고, 원가도 40%는 절감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야, 뭐..' 하실지 모르겠지만 '인피니온'이나 'ST마이크로'같은 경쟁사들도 300mm 웨이퍼 생산을 늘리고 있고, 이들과 경쟁하기 위해 'TSMC'나 'SMIC'같은 파운드리들도 300mm 웨이퍼로 아날로그 반도체를 만들어 주고 있다고 합니다. 2000년대까지만 해도 150mm나 200mm 웨이퍼로만 만들던 아날로그 반도체를 너도 나도 300mm 웨이퍼로 만들면 앞으로 업계 전체로는 공급과잉이 되지 않을까요?
반도체 산업이 장기적으로는 수요가 증가하는 성장산업이면서도 호황과 불황이 반복되는 주기성을 띠는 이유는 공장을 지어 설비를 채우고 양품을 쏟아내기까지는 몇 년이 걸리기 때문입니다. 수요가 급증하는 호황기 때는 너도 나도 공장을 짓기 시작하지만, 수요가 정체 됐을 때 그 새 공장에서 물량이 쏟아져 나오면 공급과잉으로 불황이 생깁니다.
호황과 불황의 진폭이 디지털 반도체만큼 크지 않았던 아날로그 반도체 업종도 앞으로 300mm 웨이퍼로 훨씬 많은 수량을 쏟아낸다면 그 진폭이 커질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만약 그렇게 된다면 디지덜 반도체처럼 아날로그 반도체 회사들 중에도 사라지는 회사가 나올 텐데, 저는 그게 호황기 때는 주주환원을 늘리고 불황기 때는 투자를 늘리는 이 회사가 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300mm에 투자여력이 없는 중소업체들 중에서 큰 타격을 입는 회사들이 나올 것 같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이 종목의 주가는 지금 저평가를 받고 있는 게 확실해 보입니다.
2025년 3월에, 동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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